Welcome to Liebes Tagebuch! Click

역마, 이제는 끝난 것일까

인생의 마지막 여정으로 오스트리아에 가보기로 했다. 기차로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빈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어떤 남자를 만났다. 결국 그 남자 때문에 결심은 실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린 결혼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수많은 도시와 동네를 옮겨가며 성장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수도권의 어느 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그 도시에서 살았다. 하지만 거의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주기로 '구'나 '동'을 이동했다. 초반에는 점점 넓은 집으로의 이사였고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해서 좁은 집으로 가는 이사였다. 학교는 옮기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 때문에 통학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힘들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자, 우리에게 첫 번째인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계모와 내가 고3이 되던 해 이혼하고 세 번째 부인을 맞이했다. 아버지는 그분과 같이 살기 위해 남동생만 데리고 다른 도시로 이사해 버렸다. 나는 수능과 졸업을 이유로 혼자 살아야 했다. 고2 때 이사한, 비가 오면 가끔 천장에서 물이 새던 집...

야간자율학습을 끝내면 밤 10시가 훌쩍 넘었는데, 집 주변은 가로등도 드물어서 어둠 속에 위험했다. 딸을 항상 마중 나오던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의 부탁을 듣고,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그때마다 나를 혼자 남겨두고 다른 도시로 이사해 버린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혼자 살다가 수능을 마치고 아버지가 사는 도시로 이사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아버지는 세 번째 부인과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본인이 매정하게 버린 두 번째 부인, 나와 동생의 첫 번째 계모에게 돌아갔다. 또다시 이사했다. 그곳엔 내가 머물 방이 없었다. 그래서 고시원에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사정에 따라 수십 번을 이사했다.
이삿짐을 싸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제는 한 장소에서 1년 이상을 거주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성 교제도 오래 하지 못했다. 늘 먼저 끝을 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생활을 위해 독립했다. 일 년도 되지 않아 퇴사했고, 다른 회사에 입사하고 퇴사하는 것을 반복했다. 1년씩 계약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의 원룸이나 투룸을 찾아 잠깐 머물다가 이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본인이 원인 제공자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나를 참을성도 끈기도 없는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에게 끔찍한 계모이자, 자신의 두 번째 부인에게 돌아갔지만, 서류상 이혼으로 남겨두고 계속 다른 여성들과 교제했다. 좋은 새엄마 감을 찾는다는 핑계였다. 그 사실을 모르던 첫 번째 계모는 주말마다 집에 와서 내가 도맡아 하는 모든 집안일에 트집을 잡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20대 중후반이 된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어떤 시도'를 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당시 아버지와 교제 중이던 유치원 원장님이 강하게 아버지를 비판했다. 또한 그분의 강력한 권유 덕분에 나는 1년 정도 신경정신과에서 고가의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내게 사과했지만, 그분과 헤어지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해외에도 나갔다가 적응하지 못해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30대 초, 유럽의 어느 나라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떠나, 한국을 떠나 아주 먼 곳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삶. 한국에서의 모습은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결심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현지인 직장 동료들을 포함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고 곧 서로 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하지만 그 나라는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한 곳이다. 출퇴근은 물론 주말의 짧은 외출에도, 낯선 동양인은 늘 주목받고 인종차별의 언어와 몸짓은 당연한 일인 듯했다. 어느 날, 어떤 큰 사건이 내게 일어났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나는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런데, 이번엔 이런 식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유럽의 다른 나라의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합격했다. 그 나라로 이동했다. 이미 첫 번째 나라에서 비자를 받은 기록이 있어서 노동 허가 및 비자가 정말 빠르게 나왔다. 순탄하게 유럽에서의 두 번째,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다. 10개월 정도 되었을까? 다시 퇴사했다.

매사에 금방 그만두는 나는 실패자가 분명했다.
이역만리까지 와서 '역마'를 반복하는 나,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경멸스러웠다. 정말 쓰레기가 맞았다고, 아버지가 내게 늘 비아냥거렸던 그 낙인을 인정했다. 삶에 대한 의지가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갈 곳도,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Maria-Theresia- Statue-in-Wien-2020
2020년에 촬영한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엄마의 나이, 어릴 적부터 엄마가 살았던 만큼만 살겠다던 결심. 그 나이가 되어있었다.

운명 같았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일이 사실로 일어나는 순간을 드디어 맞이하는 것인가!
엄마의 유품이 된 책들 중에 유럽에 관한 책이 많다. 나는 유난히 오스트리아를 좋아했다. 관련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문화와 역사, 음악, 예술과 철학, 작가들을 비롯 오스트리아 학파라고 불리는 경제학파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 여정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에 가기로 했다.
기차로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까? 혹은 운명이었을까? 빈에 도착한 지 며칠 후에 어떤 남자를 만났다. 결국 그 남자 때문에 '20년 넘게 손꼽아 기다려왔던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1년 후,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과 연애부터 결혼생활이 8년 차에 들어섰다.
결혼 후, 빈(Wien)이라는 이름의 도시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거나, 도중에 그만두지 않은 것은 '오스트리아'가 처음이다.

한 사람과 지속되는 인간관계이자 이성 관계 그리고 결혼까지 이어져 인생을 함께하는 동반자의 삶. 아직도 종종 '갑자기 망치에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놀라 현실감각을 잃는다. 그와 동시에 내게 주어진 삶에 진정으로 감사한다.

아직 나의 앞날이 무엇이라고 확신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다만, 절대 바꿀 수 없는 팔자라고 타협했던 '역마'를 멈출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스트리아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인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