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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성격

나는 한국인인데, 그래서 당연히 한국 사람과 대화하고 모국어인 한국말을 쓰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왜 아직도 자기 방어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날 속박하고 있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4년 전 이었다.

어떤 글을 쓰고자 펜을 들고 노트를 폈다. 아주 오랫동안 염원했고 구상했던 특별한 형식의 글을 적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안개가 걷힌 듯한 선명함,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책상에 앉게 해 준 추진력은 갑작스러웠지만 '지금'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첫 문장을 써 내려가기 전 깊은 심호흡을 했다. 펜을 쥔 손에서 뭔가 다른 힘을 느꼈다. 어느새 노트 5장 분량의 글을 완성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펜이 움직이는 그대로 몰입해 있었다. 어떻게 문장을 써야 할지, 글의 마지막 부분을 무엇으로 구성해야 할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오래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글을 쓰면 해가 밝아오는지도 모르고 갈증이나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영감에 사로잡혀 글을 썼던 5~10시간, 마치 필름이 끊긴 듯했지만 그래서 짜릿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비장한 마음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충격에 휩싸였다. 몇 번씩 읽고 또 읽어도 내가 무엇을 적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난독증에 걸린 것일까? 한국을 떠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매일 뉴스매체 등을 통해 한국어를 읽는데?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쓴 거지? 이게 한국어는 맞나?' 혼돈 속에서 컴퓨터를 켜고 모든 단어와 문장, 띄어쓰기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띄어쓰기 몇 군데를 빼고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엔 여전히 이상했다. 몇 문단을 그대로 구글 번역기에 옮겨 영어로 번역했다. 남편을 불러서 영어로 번역된 부분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대답했다. 남편 다음으로 영어로 번역된 부분을 읽어보니 그럴싸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고 혼란스러운 걸까? 노트에 글을 쓰기 직전까지, 난 한글로 된 글들을 읽고 있었는데 말이다.

Vienna-scenery-at-sunset
황금빛으로 물든 해질녁 풍경


1.
2005년 어느 날, 부모님에게 떠밀리듯 10개월간의 해외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그들이 정해두었고 나는 그저 통보 받고 어학원의 안내에 따라 일정에 맞춰 그 나라로 떠났다. 과거 국내행 비행기를 몇 번 타보았지만, 그것이 제주도 같은 특별한 도시를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면서 국내의 유명한 여행지를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촌뜨기였다. 그런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해외로 어학연수를 가게 된 것이다.

사사건건 재갈을 물린 듯 억압받고 있던 상황에서 비행기에 홀로 앉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비행기 이륙 순간의 공포감, 그런데 이번엔 몸과 마음에 날개를 달고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공포는 곧 통제할 수 없는 극도의 행복으로 변했다. 여느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영어 문법과 독해에 빠삭했지만 한마디도 대화할 수 없었던 나, 그 나라에서 영어의 말문을 텄고 새로운 삶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점차 밝은 사람으로 변했다. 단지 영어로 글을 쓰고 말할 때만이었지만 말이다.

2.
"오늘부터 모든 말에 '-요'를 붙여 말하도록 해! 지금부터 한 번이라도 존댓말 실수하면 혼날 줄 알아!"

"빨리빨리 못 깨우치겠어? 왜 못 알아먹어? 받아쓰기가 이게 뭐야! 수학, 과학 80점 밖에 못 받았어? 정신 못 차려?"

"이거 해! 저거 해! 이건 하지 마! 하라는 대로 해! 왜 아직도 안 했어? 또 혼나고 싶어?"

"아빠가 얼마나 중요한 일 하는지 알지? 아빠 욕먹일 행동하지 마! 이것도 못하면 넌 아빠 체면에 먹칠하는 거야!"

"다른 집 애들은 다 잘하는데 넌 왜 못해? 이래서 아빠가 사회생활 할 수 있겠어? 뭐? 이거 공부해보고 싶다고? 그거 해봤자 넌 성공 못해,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남들 앞에서 늘 입 다물고 항상 예절 바르게 행동해! 아빠가 무슨 일 하는지 알지? 무조건 '네'하고 대답해!"

이것은 내가 친모 사망 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어떤 여자를 새엄마로 불러야 했던, 6살부터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그들에게서 들어왔던 한국말/모국어이다.

어렸던 시절, 나의 세대는 학창 시절 내내 부모님의 직업을 적어내야 했다. 아버지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는, 매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따로 교무실로 불러 '훌륭한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가졌구나' 등의 대화와 함께 특별한 관심을 받는 학생이 되었다. 가면을 썼다. 행복한 척 그리고 최대한 할 수 있는 예의를 갖추고 바르게 생활했다. 농담 한마디도 못 하고 농담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구식', '4차원'이라고 불렸지만,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학생이었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숨기려 해도 아버지의 지위는 드러났다. 그래서 한 번도 진짜 인간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가식적이라는 오해를 받고 살았다. 도대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즐겁고 가벼운 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울분이 터지는 일이 많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방법을 모르는 나, 언제든 폭발할 수 있을 만큼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그저 가장 예의 바르고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본격적으로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영어로 소통하게 된 나는 자유로웠고 아이디어가 넘쳤고 일도 참 잘했다. 나조차도 내가 이렇게 일을 잘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국적과 문화는 다르지만, 현지인들은 내게 요즘 젊은이 같지 않은 자세가 몸에 배어있다며 칭찬했다. 개인적인 일로 사람들을 만날 때도 밝고 유쾌해졌다.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했다. 유랑하듯 떠돌았던 해외생활도 곧 10년이 되어간다. 필사적으로 한국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처럼 보이기 싫어 전 세계 어딜 가도 알 수 있는 특유의 한국식 옷차림도 바꾸고 간단한 일본어까지 익혔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도 영어로 사고하고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젠 독일어까지 배우고 있다.

독일어도 점점 잘 구사하고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영어를 잘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한국인, 모국어로만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오랫동안 '그것'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4년 전에 경험한 충격, 그 사건은 내 마음속에 작은 불씨를 일으켰고 곧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2022년 12월 한국어/모국어를 쓰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말을 쓰는 것이 어렵다.

블로그에 글 한 편을 작성하는데 기본 서너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쓴 문장이 말이 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 글을 탈고하기까지 3시간도 넘게 걸린다. 이것을 게슈탈트 붕괴(Gestaltzerfall)라고 했던가? 매번 나의 모국어가 한국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국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혼란에 빠진다.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몇몇 분들과 댓글로 교류하고 있다. 그런데 댓글을 쓰는 것이 블로그에 글 한 편을 완성하는 것보다 어렵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블로그 문화와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덕분에 나의 댓글도 남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 썼다가 지우고, 읽고 또 읽고, 수정하고, 결국 삭제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인데, 그래서 당연히 한국 사람과 대화하고 모국어인 한국말을 쓰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왜 아직도 자기 방어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날 속박하고 있는 트라우마(Trauma)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이 글도 너무 이상하다. 나 자신이 어색해 견딜 수가 없다.

오스트리아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인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