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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넷, MBC 베스트극장

그 단막극장이 완전히 끝나버렸을 때, 그 세월 동안 함께해 온 나의 인생이 송두리째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나의 꿈도 접었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서글픔까지 더해져 미운 감정이 커진다. 떨쳐낼 수 없는 애증.

그 단막극장이 완전히 끝나버렸을 때,

그동안 함께해 온 나의 인생이 송두리째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나의 꿈도 접었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서글픔까지 더해져 미운 감정이 점점 커진다. 그래서 더 떨쳐낼 수 없는 '애증의 너'.

나의 다섯번째 생일 한달 후,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계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대학교 졸업 후 독립하기 전까지, 한 번도 TV를 자유롭게 시청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어린이들을 위한 TV유치원'은 물론 '만화시리즈 한편'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친아버지와 계모의 기분에 따라 정해졌다.

계모는 같이 살게 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시점부터, 친아버지 몰래 혹은 친아버지 앞에서 온갖 이유를 대며 엄격한 교육을 핑계 삼아 나와 남동생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덕분에 우린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나이'부터 철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어떤 것도 그들에게 먼저 말하지 못했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어린아이 특유의 '떼'도 쓰지 못했다.

초등학교(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한글을 읽고 쓰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책을 읽는 것에 몰두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학교숙제와 일기를 열심히 쓰고 있다 보면 '나의 부모'가 가끔 기특함을 느꼈는지, 가뭄에 콩 나듯 TV가 있는 안방으로 불러 만화를 시청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주제가도 모르고 앞뒤도 모르는 만화를 갑자기 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을까?

TV에서 금세 눈을 떼고 책상 앞으로 가면 부모말을 하나도 안 듣는다면서 혼나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 경험이 학습이 된 나는 얼굴에 거짓감사와 가짜행복의 가면을 쓰고 그들이 "이제 그만보고 방에 들어가 공부해."라고 명령할 때까지 초점 없는 눈으로 TV를 응시했다. TV는 절대악이자 너무나도 유혹적인 금단의 열매였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라는 인간 두 명은 우리 남매를 집에 남겨두고 하루 이틀정도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럴 때면 집안일은 모두 나의 차지가 되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단기 혹은 장기 외출을 할 때면 티브이에 관련된 모든 전기선들을 뽑아 숨기거나 가져가 버렸는데, 남동생이 친구들에게 물어 TV를 작동하기 위한 전선들을 모두 구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마음껏 열어젖혔다.

나이터울이 있는 관계로 관심사도 달랐다. 동생은 그저 만화시간에 볼 수 있을 만큼 만화들을 시청하면 충분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두 시간이 지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 시청을 마친 동생은 자기 방으로 건너가 금세 잠들었다. 나는 고요함 속에서 혹시나 몰라 안방에 불도 켜지 않고, 그들이 갑자기 일정을 바꿔 집에 들이닥칠까 하는 두려움에 편하게 앉지도 못한 채 채널을 돌렸다.

TV속에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빠질 수 없는 화젯거리가 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가요프로그램, 만화나 뮤직비디오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TV채널들까지.

하지만 그것들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매일 보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다큐멘터리나 교육 방송 채널의 프로그램들을 봤다. 늦은 밤이 되면 깊이 있고 심오한 내용을 방영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만약 부모에게 TV 시청을 들켰을 경우 혼나지 않을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점점 부모의 장기 외출을 바라고 또 염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프로그램에 사로잡혔다. 소위 미니시리즈 혹은 연속극은 아닌 것 같았다. 영상의 중반부부터 보게 된 것 같았다. 프로그램의 이름이 나오길 기다렸다.

운 좋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MBC 베스트극장'이란 자막과 함께 단막극의 제목이 나왔다.

그 순간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뭔가 모를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진지하고 무겁기까지 한 어른들의 이야기. 고작 10대인 내 가슴이 참 많이 떨렸다.

MBC-Best-Theater
MBC 베스트극장 캡쳐 사진

그 후부터 신문에 인쇄된 TV프로그램 목록을 스크랩해, 'MBC 베스트극장'이란 단어를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 표시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글짓기에 두각을 나타난 덕분에, 아버지는 나를 '미래의 ㅇㅇ여대 법학과 혹은 신방과 학생'이 될 것이라며 기대했다. 나를 위해 각종 신문사의 신문 구독은 물론, 집안의 모든 책장에 더이상 빈 공간이 없을 만큼 책을 사주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수능 공부'를 이유로 부모 앞에서도 TV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친 아버지는, 그동안 자신이 너무 엄격했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미안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교육적인 목적의 프로그램은 언제든지 보라고 말했다.

덕분에 교육방송채널의 고등학교 과정은 물론 토론프로그램, 각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까지 시청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신의 딸'이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담임교사의 칭찬 때문이었을까? 유행을 타거나 자극적이지 않을 조건에 한해서 드라마 같은 프로그램도 볼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자유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학업에 치여 TV 앞에 앉을 시간이 없었다. 특히 MBC 베스트극장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에 내 일정을 맞추는 것은 힘들었다. 가끔 주말에 한 번씩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만끽했다.

그때부터 어른이 되면 꼭 'MBC 베스트극장'에 공모해 보겠다는 꿈을 꿨다.

나의 글솜씨가 어서 원숙해지기를 바랐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늘 노트를 휴대하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길을 걷다가도 멈춰서 노트에 글을 적었다. 사실 고등학생과 재수시절 있었던 지옥 같은 가정불화로 공부에 열중할 수 없어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스스로 비웃을 만큼 초라하고 실패한 스무 살을 지냈다.

그럼에도 아직 젊은 패기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놓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망과 무너진 시간이 있었기에 그 당시 글을 지속해서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나날 속엔, 늘 MBC 베스트극장이 함께 있었다. 대충대충 다니던 대학 생활, 그 와중에도 교수님 몇 분이 나에게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알아봐 주셨다. 서술형으로 쓰는 시험문제에 대한 답안, 리포트에서 글솜씨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다.

편입을 권유받았다. 본격적인 '글쓰기 기술'을 공부하라고 응원하셨다.

나는 그때 태어나 두 번째로 누군가에게 나의 꿈을 말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심장이 요동쳤다. 편입을 준비하는 내내 '비 온 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펼쳐진 듯한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편입 지원 직전에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비웃음 반, 그리고 '너 주제'에? 하는 의문문의 형태로 나를 무시했다.

그럼에도 편입 인터뷰까지 마치고 보란 듯이 합격했다.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식을 알리는 나에게, "재수도 실패한 네가 편입한다고 해서 졸업 후에 글을 쓰면서 월 100만 원은 벌 수 있겠어? 네가 니 글로 언젠가는 유명해질 수는 있을까? 그렇게 꼭 편입하고 싶으면 집 나가!, 그리고 알아서 살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부모에게 의견을 말해본 적도 말대꾸하거나 반항해 본 적도 없는, 여섯 살부터 폭력과 폭언에 억눌려 살아온 나에게 더 이상은 무리였다.

대학교 편입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해에 'MBC 베스트극장'이 종영했다.

오스트리아를 사랑하는, 오스트리아에 거주 중인 한국인.